남양홍씨는 2개 대계보로 나뉘어지는데, 본 토홍계는 경기 남양에 세거한 사족의 후예로 고려조 금오위위별장동정 홍선행(洪先幸)을 시조로 하여 세대를 이어오고 있다.
남양홍씨는 고려말 공조전서를 역임한 덕의(德義)와 조선 초에 호조참판을 지낸 자경(子儆)을 필두로, 관찰사를 지낸 익생(益生), 좌수사를 지낸 귀해(貴海), 주부공을 역임한 귀호(貴湖), 대호군을 역임한 귀연(貴演)과, 귀해의 아들 형(泂). 식(湜). 한(瀚)이 문과에 연벽(聯壁)하여 형은 부제학, 식은 좌승지, 한은 이조참의가 되어 가문을 빛냈으나, 연산 갑자·무오사화에 화를 입고 가장문적(家藏文籍)이 모두 소실되었다.
귀연의 아들 숙(淑)은 정난공신에 책록되고 당원군에 봉작, 의정부 좌찬성 역임 후 시호는 장민(莊敏)이다. 형의 아들 언필(彦弼)은 영의정을 역임, 시(詩). 서(書). 화(畵)에 뛰어났으며 사궤장(賜?杖)하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아들 섬(暹)은 문과 장원하여 선호당(選湖堂)·입기사(入耆社)하고 영의정을 3회에 걸쳐 역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담(曇)은 5개조(五個曹)의 판서를 지내고 의정부 좌참찬 역임 후 청백리에 녹선,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홍주목사로 이몽학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청난일등공신에 책록, 영원군에 봉작된 가신(可臣)은 형조판서를 역임,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학사공 익한(翼漢)은 장원급제하고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 청나라에 잡혀가 순절한 충신열사이다. 가신의 손자 우량(宇亮)은 수군절도사를 역임 후 청백리에 녹선되고, 대용(大容)은 음양오행설을 부정하고 기화설을 주장한 실학의 선구자이다.
남양홍씨는 조선조에서 문과 급제자 123명, 시호 받은자 13명, 봉작위자 12명, 청백리 3명을 배출했다.
항일투사 사구(思九)는 을미사변시 의병에 가담하여 일본군과 격전 중 장열하게 전사하여 항일열사로 추앙을 받고, 봉선화 작곡자인 난파(蘭坡) 영후(永厚)는 현대음악의 선구자이고, 6.25 동란시 해군의 영웅 대선(大善)은 황해도 순위도에서 피난민 840명을 구하고 장렬히 산화, 이를 기리고자 유도탄고속함을 제작 『홍대선함』으로 명명 진수하여 현 해군의 사표(師表)가 되어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