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문무의 명문 '신창 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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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문무의 명문 '신창 노씨'
  • 양민규 기자
  • 승인 2023.08.11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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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작품은 유래비를 감싸 안은 듯 두 기둥의 선조와 후손의 화합을 상징하였다.작품 중심부 투구는 신창노씨 선조의 武를 상징하였으며, 전체적 아치형 문(門)의 형태는 신창노씨 문중을 의미한다.
본 작품은 유래비를 감싸 안은 듯 두 기둥의 선조와 후손의 화합을 상징하였다.작품 중심부 투구는 신창노씨 선조의 武를 상징하였으며, 전체적 아치형 문(門)의 형태는 신창노씨 문중을 의미한다.

신창노씨의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신창은 백제의 굴직현(屈直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대에 기량현(祁梁縣)으로 온정군(溫井郡)에 속했다가 태종대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되었다.

신창노씨는 당나라 한림학사 노수(盧穗)의 차남 노오(盧塢)가 통일신라에 귀화하여 교하백(交何伯)에 봉해진 데에서 연원되었다. 교하백 노오의 후손인 태자태사 삼한공 노강필(盧康弼)의 증손이며, 문하시중 평장사 의정공 노영순(盧永醇)의 차남인 노지유(盧智儒)는 검교장군으로 공적공훈에 의하여 판도판서에 제수되었으며 신창(新昌)으로 봉득관(封得貫)하여 교하노씨(交何盧氏)에서 분관되어 신창노씨의 득관조(得貫祖)로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오면서 문무의 인재를 배출시켜 명문으로 되었다.

노지유의 육세손으로 어모장군에 제수된 노규부(盧赳夫)는 성종때 지방관아로 옮겨와 후손들이 대전광역시 유성구 문지동에 오백삼십여년을 살아왔으며 칠세손 건공장군 노미수(盧眉壽)는 용장이었으며 팔세손 부장공 노식(盧軾)은 문무에 현달하였고 단성현감 낙헌공 노집(盧輯)은 청렴하였으며 후손들이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에도 세거하고 있다.

이처럼 역대의 역사가 담긴 뿌리 깊은 삶의 터전을 근대사의 정책에 의한 대덕연구단지 조성으로 인하여 1988년도에 주민 전체가 이주하여 후예들은 충효의 정신으로 대전과 삼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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