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문충공 개(開)는 신라말에 강양(江陽:현 합천)으로 옮겨 합천이씨의 근원을 이루었다.
높은 학덕을 쌓아 벼슬길에 나아가 한림학사에 올랐으며, 국가에 큰 공을 세워 강양군에 봉작되었다. 고려 건국시 불사이군의 충절로 불복하여 가수현장(嘉樹縣長)에 이어 강양호장(江陽戶長)으로 강직(降職)되었으나 덕치선정(德治善政)을 하였으며, 빼어난 학문으로 후학을 길렀다. 고려말 사헌부의 대간들이 그의 학문과 청절은 백세의 사표라며 상계하여 문충공의 시호를 내린 것으로 전한다.
이후 충효절의와 선비정신으로 찬연히 이어져 고려와 조선의 양조에 걸쳐 봉군(封君) 및 시호를 받은 이가 각 일곱 명이며, 충신·효자·열녀가 많이 배출되어 현충(顯忠)·정려(旌閭)를 받았다. 자손도 크게 번창하여 전객령·판사공·전서공·병사공· 교리공·첨사공·목사공·부사공·사간공·제학공·사인공·생원공·상서공·참지공 등 15개 파가 있다.
불교계의 거승 성철 조계종정, 문단의 이병주 소설가, 이만섭 국회의장을 비롯한 역대 국회의원, 중앙정보부장, 내무·건설·교통부장관, 육군참모총장 등이 배출되어 각 분야에서 숭조상문(崇祖尙門)과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