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이씨(陽城李氏)의 시조 이수광(李秀匡)은 송나라 태생으로 고려 문종조(1046~1083)때 삼중대광 보국의 벼슬과 양성군(陽城君)의 군호를 받아 득성하였다.
시조 이수광은 고려 문종 조 때 누차 거란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강유 겸전한 인품으로 상호이해와 설득과 무마로 동침야욕을 봉쇄하고 선린우호관계를 맺어 나라를 안연(安然)하게 한 공을 세워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출장입상과 덕망이 높아 당시 세인들이 당나라 곽자의(郭子儀)에 비유하였다.
송나라가 구원을 청해오자 왕명으로 원정, 한 달에 세 번 승첩을 거두매, 황제가 연회를 베풀고 “고려대신 이수광은 공관천하(功冠天下)요, 명양후세(名揚後世)하리라”고 써주고 특진금오위대장군 상주국의 작위를 내리니, 당시 사람들이 영귀공자(榮貴公子)라 칭송하였다.
양성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이수광이 정난공신 제일로 책훈되고, 양성을 채읍(采邑)으로 하사 받은 사패지지에 연유되었다. 시조의 유지가 양성향교의 곁이라고 하며, 묘소는 그 뒤쪽 몇 리쯤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표지가 없어 실전했다. 양성은 고구려 때 사복흘(沙伏忽), 신라 때 적성(赤城), 고려 초 양성(陽城)으로 정한 지명으로 안성시 양성면과 평택시 죽백동 일원의 옛 지명이다.
현 경기도 평택시 죽백동 산 43의 7 유좌지원에 1848년 헌종 14년 시월, 시조 휘 수광의 단과 5세위까지 설단 하였다. 1984년 5월 20일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신월리 산 20 무갑산 능골에서 4세 부마공(駙馬公) 영주(英柱), 배위 순정공주(順正公主), 계배위 정씨의 묘소를 시조단하에 천묘하였고, 2013년 11월 3일 황해도 신계군 마서면 중용리에 묘소가 위치한 6세 석탄공(石灘公) 수방(守邦)의 단비를 추가 설단하여 명실상부하게 시조묘역을 성역화하고, 매년 음 10월 1일 세향을 받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