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의 뿌리] 3대가 ‘君’에 봉해진 '함안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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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뿌리] 3대가 ‘君’에 봉해진 '함안 이씨'
  • 양민규 기자
  • 승인 2023.10.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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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와 이조시대에 걸쳐 조국에 헌신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기상을 조형화 함.
고려조와 이조시대에 걸쳐 조국에 헌신하고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기상을 조형화 함.

함안이씨(咸安李氏)는 고려 고종(서기1213-1259) 때 광록대부에 오르고 공을 세워 파산군(巴山君)에 수봉된 상(尙)을 시조로 받든다.

파산은 경상남도 함안군의 옛 이름으로 후손들은 시조의 봉군지인 함안을 관향으로 삼고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파산군의 두 아들인 2세 문하시랑평장사 청(淸)과 판도사판서 충의공 원(源) 형제, 3세 문하시중 홍(弘)과 상장군 원수 중서평장정사 충렬공 방실(芳實) 종형제가 함안이씨의 현달의 문을 열었다. 특히 충렬공은 1361년(공민왕 10년) 20여만명의 홍건적이 침입하여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으로 피난하자, 다음해 도지휘사로서 적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는 등 여러 차례 나라를 위기로부터 구한 구국의 명장으로, 고려조 왕들의 사당인 경기도 연천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된, 고려 500년 사직을 지킨 16공신 중의 한 명이다.

조선 세조 때 대사성을 지낸 8세 미(美)는 고향인 진주군 동면 가좌촌리 진동 월아산 아래에 용두정(龍頭亭)을 짓고 “육영일문 현재배출”의 기치 하에 배움에 불타는 학동들과 네 아들(仁亨, 義亨, 禮亨, 智亨)의 정훈에 힘써 “오부자 육급제”를 이루니 성종이 진동에 가좌촌(佳佐村)이라는 마을 이름을 하사하였다. 또한 사재감부정을 지내고 이조참판에 추증된 8세 계통(季通)은 순충보조공신 함성군(咸城君)에 추봉되었고, 그의 아들 9세 세응(世應)은 중종조에 분의정국공신이 되고, 이조참판과 4도의 관찰사등 많은 벼슬을 거친 후 함안군(咸安君)에 수봉되어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이처럼 한 문중에서 3대가 ‘君’에 봉해진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2세 응성(應星,의형의 증손 號 新川齊, 고원군수)은 창의하여 대공을 세우고 가선대부 병조참판으로 추증되었으며, 13세 달(達, 의형의 현손, 號 雲圃, 동지중추부사) 역시 창의하여 진주성 방어에 참가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우고 여러 벼슬을 거친 후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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