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황씨(長水黃氏)의 시조는 신라 말 경순왕의 부마(駙馬)이며 시중(侍中)이었던 황경(黃瓊)이다.
그 후손 황공유(黃公有)는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 벼슬을 지내다가 선대의 고향인 장수(長水)로 귀향하였다가 남원으로 이주하여 현 광한루터에 세거하였다.
그후 태학생(太學生)으로 학문에 뛰어나 일재(逸齋) 황감평(黃鑑平)의 증손인 황석부(黃石富)가 장수황씨 중시조이며 그의 증손이 청사에 길이 남은 황희(黃喜) 정승이다. 황희 정승은 90평생에 70여 년을 관직에 있으면서 조선 개국 이래 세종에 이르기까지 4대 임금을 모시고 육조판서를 두루 역임하였으며, 정승으로 24년 중 영의정으로 18년간 재임하면서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고 세종대에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우리 역사상 가장 훌륭한 정승으로 세종묘정에 배향되었고, 청백리로 추앙받고 있다.
황희 정승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치신(致身) 둘째 보신(保身) 셋째 수신(守身)이며, 셋째 수신은 아버지에 이어 영의정에 올라 가문의 영예를 이어갔다.
조선조 중엽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으로 장산군에 책봉된 정의공(貞懿公) 황탄(黃坦), 정국공신 장원군에 봉해진 소양공(昭襄公) 황맹헌(黃孟獻), 임진왜란 직전 일본 통신사 정사로 적정을 정확하게 보고한 송당(松堂) 황윤길(黃允吉), 임진왜란 때 충청도병마절도사로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무민공(武愍公) 황진(黃進) 장군, 광국공신 장계부원군 대제학 문정공(文貞公) 황정욱(黃廷彧), 등이 일족의 명예에 빛을 더 하였다.
한말 매천야록을 집필 중 한일합병의 국치를 통분하다가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이며 유학자인 매천(梅泉) 황현(黃玹) 등이 근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