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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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세상을 비추는 거울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09.01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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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어떤 면에서는 글이나 책을 읽는 것보다 그림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게 더 용이하다. 글은 대체로 자신의 생각을 꾸미기 때문에 왜곡된 형태로 저자의 생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하다못해 지극히 비밀스러운 일기를 쓰더라도 나름대로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미화하는 경향이 조금씩은 있지 않은가. 이에 비해 그림은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불쑥 드러내기 때문에 더 생생하다.”(P84)

박흥순의 《미술관 옆 인문학》이 책은 미술작품을 소개하는 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저자의 눈에 비친 작품의 끝에는 인문학과 연결되어 있다. 미술작품에는 어떤 이야기, 메시지가 담겨있다. 저자는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화두를 꺼내고, 그 화두를 그의 풍부한 인생경험과 지적 소양을 바탕으로 인문학과 연결한다.

규격화된 삶을 거부하는 집시

<잠자는 집시>_루소, 1897

이 그림은 앙리 루소(Henri Rousseau, 1844-1910)의 《잠자는 집시》이다. 물병과 악기, 지팡이 하나를 들고 달빛을 이불삼아 사막을 떠다니는 집시 여인, 이 그림에서 들판에서 잠자는 불편, 맹수의 위협을 받는 불안도 있으나 어디에도 구속되고 조정 받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화두로 꺼낸다. 그러면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와 연결한다. 작가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새비지를 통하여 불편과 불안, 위험하게 살 권리 즉 추하고 무능할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기아와 고통의 권리 등 하나같이 정신 나간 소리를 주장한다.

“저는 편안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시를 원하고 현실적인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악을 원합니다.”

새비지가 말하는 불행하게 되는 권리는 각종 인간적 가치와는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문명이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이 세상에서 점점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런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규격화와 표준화는 산업 사회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이번 규격화와 표준화가 하나의 규범처럼 인간의 내면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산업 사회에서 신분적 억압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현대인은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볼 수 없다. 모든 삶을 임금에 의존하고 결국은 기업에 내맡겨야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신세계에서 불행해질 권리는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이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유토피아란 설사 그 이상이 아무리 훌륭하고 그것이 아무리 완벽하게 달성된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할 ‘자유’를 빼앗는다면 우리가 원하는 이상사회는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정신적인 유목민과 집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밤, 자유의 공간과 고독한 군중

나는 인상파 화가인 빈센트 반 고흐를 좋아한다. 인상파 화가인 고흐는 자연의 빛을 사랑했다. 빛의 아름다움은 밤에 있다. 밤은 인간의 감수성을 최고조로 올리는 역할을 한다. 밤의 세계를 그린 고흐의 작품에는 《밤의 카페 테라스》, 《별이 빛나는 밤에》,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등이 유명하다.

<론강 별이 빛나는 밤>_고흐, 1888

고흐는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뒤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있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소리가 들리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갈 것 같기도 하네.

낮은 세계는 실명의 세계이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써야 하고 그에 맞추어 처신한다. 실명의 세계인 낮을 지배하는 것은 이성이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사회적 통념이 요구하는 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밤은 우리에게 해방감을 주는 세계다. 어둠을 통하여 나와 타인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생기고 그 거리만큼 자유의 공간이 형성된다. 하지만 현대사회로 올수록 밤은 자유가 아닌 비어있는 시간, 두려움의 세계로 변질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개척지로 다가 온다. 원래 타인에 의한 시선의 지배력이 큰 사회일수록 개인의 내면은 더 낯선 것이 되기 마련이다.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을 소개한다. 여기서 타인에 의한 시선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대 사회를 타인 지향형 사회로 규정한다. 현대인들은 밤에 찾아오는 혼자만의 시간, 고독한 시간을 참지 못한다. 아니 자기만의 시간을 기피하려고 한다. 낮의 세계가 강제한 타인 지향성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밤의 고독을 참지 못하고 다시 타인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개인의 자유는 고독을 먹고 자란다. 사회의 통념이나 부당한 강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고독한 성찰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고독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고 자유롭기 때문에 고독하다. 밤을 두려워말고 내 안의 타인을 쫓아 보내고 내안에 나를 가득 채우자고 말한다.

2개의 자화상, 인간의 마음

<자화상> 윤두서. 국보 제240호

화가에게 자화상은 일종의 일기와 같다. 자신의 형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면을 응시하는 작업이다. 내면의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모델을 구하기 어려웠던 고흐는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고흐는 일생동안 36번에 걸쳐 자화상을 그렸다. 한국을 대표하는 자화상으로 윤두서의 그림을 제일로 꼽는다. 강렬한 기를 내뿜는 그의 눈빛이 섬뜩하다. 그는 조선시대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모진 고초를 당했다.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 뒤로 언뜻 쓸쓸함이 보인다.

렘브란트도 자화상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린 자화상만 약 100점에 이른다. 그의 노년기때 자화상은 몸도 마음도 푸석푸석하여 손을 갖다 대면 부스러기처럼 무너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의 말년은 엄청난 빚더미로 비참했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숨김없이 솔직하게 드러낸다.

현재의 자신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용기가 대단하다. 죽음이 두려운 만큼 인간은 그 앞에서 솔직해진다. 카뮤(Albert Camus, 1913-1960)는《시지프의 신화》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살이 아닌 철학적인 차원에서 자살의 문제를 검토하고 있다.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 바로 이것이 죽음에 대한 사고라는 것이다. 죽음 자체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때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흐르고 죽음에 대한 성찰이 깊어질 때 초라한 자신의 모습까지도 덤덤하게 인정하고 자신을 고스란히 자화상으로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을 끝낸다.

“모래를 손에 가득 쥐고 강하게 힘을 주면 줄수록 모래는 더 빠르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결국 허전하게 빈손만 남는다. 손을 느슨하게 펼치고 손에 빈 공간이 생겨야 모래를 쥘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빈 공간은 단순히 비어 있는 게 아니다. 가득 찰 준비를 하고 있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인간의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어 있을 때 채울 수 있다. 스스로 부끄러울 수 있을 때 당당할 수 있고, 스스로 초라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도약도 가능하다. ”(P134)

이성과 광기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그림이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하지만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무자비한 폭정과 탄압으로 봉건 체제를 끈질기게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교회권력은 이단 재판소를 통한 마녀 사냥으로 이단자를 낙인찍고 사형 집행 장으로 사람들을 내몰고 있었다. 마치 괴물들의 축제 같았다.

고야는 미치광이 같은 살육이 판치는 괴물 같은 스페인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이성 즉 지성의 각성에서 찾았다. 고야의 기대대로 이성은 과연 인간 사회에서 괴물을 몰아냈을까? 그것은 고야의 착각이었다. 이성의 토대 위에 세워진 근대사회가 신분제나 마녀 사냥이라는 괴물을 사라지게 한 대신 또 다른 괴물을 스스로 창조할 수 있음을 몰랐다. 이성이 만들어낸 괴물이 더 흉측하고 난폭할 수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 주었다.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육체나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 정신만을 몰두시키는 것은 가장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성찰》에서 감각에 기초한 사고가 인간을 진리로 인도할 리가 없기 때문에 감성적인 사고를 배제하고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에 기초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 이성적인 사고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요소를 지니고 있는 수학과 기하학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산가능성과 증명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수리적 사고 방법이 곧 이성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과학기술 만능주의, 산업화 제일주의를 낳는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주택문제, 교통문제 등 온갖 도시문제, 환경파괴, 생태계 파괴, 자원 고갈, 유전자 조작, 인간 복제, 대량 살상 무기, 20세기를 뒤흔든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은 수많은 문제점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이성의 부족이 아니라 이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을 비롯한 집시, 노약자, 동성애자 등 600만 명을 학살한 광기는 이성의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성의 내부에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져 왔다.

파놉티콘 사회

<죄수들의 보행> 고흐, 1890

고흐의《죄수들의 보행》 이 그림은 구스타프레가 지은 《런던》이라는 책 속에서 실려 있는 삽화를 모사해 그린 것이다. 고흐는 귀를 자르는 발작을 일으킨 후인 1890년 생 레미 정신병원 독방에 갇혔을 때 렘프란트 등 다른 화가들이 그린 작품을 모사하곤 했다.

고흐는 감옥 안에서 간수의 감시 아래 좁은 공간을 빙빙 돌아야 하는 죄수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보지 않았을까?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에서 서구의 근대화는 토론과 대화로 정신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감시와 처벌의 채찍으로 잔혹하게 신체를 길들이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감옥은 범죄자들의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권력의 사회통제를 위한 전략의 소산이다. 개인은 국가의 이익이라는 틀 내에서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하는 장치적 역할을 한다. 처벌의 기구는 감옥만이 아니라 가정, 학교, 군대, 병원, 공장 등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소속되어 살아가는 공간들이 사실상 감시와 처벌의 기구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사회와 현대사회는 감금사회, 관리사회, 처벌사회, 감시사회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현대사회가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덤(Jeremy Bentham, 1748-1832)이 말한 파놉티콘(Panopticon) 즉 원형 감옥 같다고 말한다. 파놉티콘은 1791년 벤덤이 고안해냈다. 바깥쪽으로 원주를 따라 죄수를 가두는 방이 있고, 중앙에는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 공간이 있다. 중앙의 감시 공간에 있는 간수는 죄수의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도록 죄수의 방은 항상 밝게 유지되고 중앙의 감시 공간은 항상 어둡게 유지되며 죄수는 간수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파놉티콘에 수용된 죄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항상 자신을 감시하고 있을 간수의 시선 때문에 규율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 정보화 사회가되면서 파놉티콘 현상은 두드러진다. 여기저기 설치해놓은 CCTV, 전자주민카드, 개인 이메일, 핸드폰 위치 확인 서비스 등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보나 행동을 관리 감시하는 이들을볼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적으로 우리를 관리한다. 고흐의 그림 속에서 줄지어 걸어가는 죄수들의 모습이 혹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일상성의 감옥

<뫼비우스의 띠2> 에셔, 1963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 1898-1972)는 서양미술사를 통틀어서 볼 때, 독특한 화가의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장면을 그리는 화가로 유명하다. 에셔의 작품 중 반복과 순환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뫼비우스의 띠》가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의 도형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다. 그림을 보면 그물 모양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의 띠를 돌아 도는 개미들의 행렬이 묘사되어있다. 개미들은 한 면을 계속 기어가다보면 어느덧 원점으로 회귀한 뒤 다시 왔던 길로 끝없는 여정을 시작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삶이 뫼비우스의 띠를 한없이 도는 개미와 같은 게 아닐까? 현대인들은 매일 매주 매달 심지어 매년 해가 바뀌어도 거의 비슷한 일상을 되풀이하여 산다. 당신이 학생이나 직장인, 가정주부라도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은 잠시 뿐 결국 끝없는 일상성의 늪에 발을 담근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일상이 소리 없는 지배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현대사회에서 국가나 자본 같은 권력이 만들어 낸 새로운 무기가 바로 일상의 지배이다. 사람들을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사회나 정치문제, 인간의 내적인 문제에 대하여 망각케 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장치는 없다. 특히 일상의 지배가 개인의 욕구와 연결된 것처럼 여겨지게 될 때 효과와 지속성은 더욱 강력해진다.

일상과 욕구의 연결은 소비사회 속에서 아주 손쉽게 이루어진다. 이 일상성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한 르페르브(Georges Lefebrave)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대사회는 곧 소비사회이며 소비의 자유가 인간의 자유를 대신한다.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나 사회적 억압에 대한 관심은 사라져 버린다. 가정주부는 세탁기, 식기건조기, 진공청소기 등을 소비하고 여기에서 늘어난 여가시간은 다시 쇼핑을 통한 소비가 차지한다.

소비를 통한 순간의 충족을 위하여 생의 대부분을 뫼비우스의 띠에서 보내면서도 스스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고 여긴다. 르페브르는 소비사회의 일상성을 제대로 분석함으로써 근본적인 사회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하여 우선 일상 속에서 살며 일상을 체험할 것, 다음으로 그것을 수락하지 말고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할 것을 그는 요구한다.

그런데 이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우리는 소비의 덫에 매몰되어 어떠한 문제의식도 발견할 수 없다. 에셔의 <일상성>을 비롯한 많은 그림들은 우리에게 일상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당연해 보이던 것에 대한 의아함은 일상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아무런 문제 의식 없이 일상에 매몰되었던 삶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앙리 르페르브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일상에서 약간 뒤로 물러서지 않고는, 다시 말해서 그것을 그대로 수락하고 수동적으로 일상을 삼아서는 결코 일상의 본래 모습을 포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저게 무슨 미술이냐?

<샘> 마르셀 뒤샹, 1917

1917년, 세상이 러시아 혁명으로 발칵 뒤집혔다면 미술계는 뒤샹(Marcel Duchamp)의 《샘》이라는 작품으로 뒤집혔다.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에 남성용 변기 하나가 덩그러니 등장했다. 말 그대로 변기였다. 어느 공중변소에서 볼 수 있는 남성용 변기를 떼어다 ‘샘’이라는 제목으로 올려놓았다. 무언가 아름다움을 만끽하려고 찾는 전시장에 등장한 변기를 보고 제일 먼저 주최 측이 경악했다. 결국 주최 측에 의해 전시되지 못하고 전시장 칸막이 뒤로 치워졌다.

이에 뒤샹은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하여 이를 대대적으로 반박했다. 요지는 이렇다. 아름다움이란 가치는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고 상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설사 누가 보아도 아름답다고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예술의 표현대상에서 배제될 필요는 없다.

자기가 직접 만들었는가의 문제도 미술의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기성품을 그 일상적인 환경과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면 본래의 목적성은 상실하게 되고 단순히 사물 그 자체의 무의미함만이 남게 된다. 직접 만들지는 않았지만 특정한 시공간에 있게 함으로써 상상력을 자극하고 의미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도 하나의 소중한 창조 행위이다. 영국 미술계 인사 500명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 미술 작품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뒤샹의 《샘》이 1위를 차지했다.

이밖에도 이 책에는 코로(Jean-Baptiste-Camille Corot, 1796-1875)의 《책 읽는 여인》과 여성 해방 운동의 교과서인 보브와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의 《제2의 성》, 주인공 돈키호테와 같이 개혁을 바라는 뜻에서 도레(Gustave Dorè, 1832-1883)의 《서재의 돈키호테》와 아담 스미스 (Adam Smith,1723-1790)의 《자본론》, 할스(Frans Hals, 1582-1666)의 《유쾌한 술꾼》의 순수한 웃음과 자신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웃음이 노골적으로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에코(Umberto Eco, 1932-)의 《장미의 이름》등이 있다.

이 책은 미술관이라는 책 제목 때문에 마음 편하게 읽기 시작했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자유의지, 여성문제, 전쟁과 평화, 시장과 복지, 이성과 감성, 양극화와 빈곤, 현대문명과 소외 등 많은 담론에 대하여 저자는 쉬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저자 박흥순 선생은 참 생각이 많으신 분이다. 사회전반에 대해 나름대로 의식이 있다. 그는 복잡한 거리의 낯선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우리에게 인문학을 통하여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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