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중구 어남동에 위치한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생가지는 선생이 태어나 8세까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1993년 복원된 생가는 초가지붕에 방 세 칸과 부엌으로 구성됐다.
선생은 이곳 도리미 마을에서 신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충북 청원으로 이사를 했다. 19세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26세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고, 을사조약 후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언론을 통한 민중계몽운동과 민족의식고취를 위한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항일비밀단체인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자 1910년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192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감옥에 수감되었다가 57세 되던 해인 1936년 2월 21일 옥사했다.
적과 타협 없이 독립투쟁을 전개하는 동안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와 같은 견해가 곧 그의 역사연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고,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는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하면서 한국 근대사학의 기초를 확립했다.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 조선사론(朝鮮史論),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建國三傑傳),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묘소는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에 위치한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