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익과 당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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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익과 당익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6.12.0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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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이덕일의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한마디로 숨 가쁘게 내리 읽었다. 재미도 있었지만 내가 사는 지역이 은진 송 씨의 텃밭이고 우암 송시열 선생의 흔적이 아직도 이 지역 곳곳에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이덕일의 이 책은 신화 같은 존재인 우암의 비판서이다. 역사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는 사람도 우암 송시열선생 하면 먼저 북벌론을 떠올리고 그 다음으로 사색당파 정쟁을 떠올린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썼다지만 나는 읽기 쉬운 이와 같은 종류의 평전을 읽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배움이 짧다. 그래도 의미를 둔다면 조선시대 중기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위기가 닥친 시기에 집권층의 생각과 대응에 대하여 알아보고, 배우는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위함이다.

우암은 충청도 옥천 구룡촌에서 1607년 선조 40년에 태어나 옥천 인근의 송촌 비래 소제에 옮겨 다니며 살았으며 1689년 숙종 15년 83세의 나이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당시는 임란, 호란을 겪고 난후라 국가의 존립과 신분질서, 민생이 무너져 내리고 왕을 중심으로 서인, 남인 사이에 치열한 당파싸움이 있었던 시기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우암의 이름이 3천 번 이상 언급되었다니, 그가 차지한 정치적 비중이나 영향력은 우리 역사상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다. 최고의 사상가이며 정치가로 당쟁의 중심이었으며, 사림의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사회의 정치적 계보는 학문적 계보이다.

어디서 살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학문을 배웠느냐이다. 선조 7년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김효원과 심의겸의 싸움으로 내편 네편 생긴 당파는 동인은 퇴계 이황을 종주로 삼아 영남 선비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서인은 율곡 이이를 종주로 삼아 경기와 충청 일대의 선비들로 이루어졌다. 이후 권력투쟁이나 의례 해석에 따라 분파를 계속 하여 동인은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우암은 서인의 영수로 두 번 짧게 남인에게 정권을 내주었으나 그가 죽은 5년 후 장희빈이 폐출되는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복권이 되서 그 후 서인은 무려 200년 동안 집권 여당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암의 스승은 조선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이었고 가까운 일가인 동춘당 송준길과 동문수학한다. 조선 중기 임란 호란 이후 지배계급인 사대부는 신분질서가 와해 되어가는 위기에 처하자 예학을 성리학의 주류로 삼는다. 예학이란 지배계급인 사대부에게 지배당하는 농민이 분수와 예절을 지키는 규범학이다. 결국 일반 백성의 삶은 외면한 채 사대부의 기득권을 지키는 꼴이다. 우암은 예론의 권위자로 1차, 2차의 예송 당쟁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덕일은 먼저 서인들의 인조반정은 아주 잘못된 쿠데타로 규정하고 조선 시대 종말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1623년 일어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은 두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첫째로 명나라의 파병요청을 거부한 것은 임진왜란 때 구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며 두 번째, 선왕인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서궁에 유폐시킨 것은 불효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장을 누볐던 광해군은 현실적인 이유로 친청배명(親淸排明)의 외교정책으로 급선회한다. 명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청나라를 무시 하려면 그보다 훨씬 강하여야 되는 데 조선은 그러지를 못했다. 결국 아무런 대비책 없이 친명배청이라는 명분만 쌓다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치욕을 당한다. 친명배청이라는 서인들의 쿠데타 명분은 이후 조정의 통치이념이다. 역사는 그저 역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국으로 둘러싸인 우리는 국제적 현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실리적인 면에서 판단하고 강대국 간의 균형적인 외교 전략이 필요하다.

저자는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 9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으나 그냥 시간만 죽이지 않았다. 천주교 신부와의 만남을 통하여 새로운 학문인 서학을 접하고 서양의 뛰어난 문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현실적인 국제정세를 몸소 겪고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관념론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서양 문물을 만들어 내는 실용학문이며, 이것이 곧 힘이라는 것을 안다. 청의 태종은 명과의 전쟁터로 조선의 왕이 될 소현세자를 데리고 다닌다. 청의 힘을 보게 하고 스스로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덤으로 그들과 끈끈한 인간관계도 맺는다. 청 태종은 명이 망하고 더 이상 조선이 위협의 대상이 아니다 라고 판단하여 소현세자를 조선으로 돌려보낸다.

부왕 인조는 청나라가 자신을 폐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우지 않을까 의심하고 저주한다. 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많은 의혹을 남긴 채 죽는다. 인조의 독살설이다. 이덕일은 소현세자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는 최초로 개방적 사고를 가진 왕권 계승자로서 계몽군주가 될 가능성 있는 사람이었다. 소현세자가 아담 샬과 교류할 때가 1644년이다. 이는 일본이 페리제독에 의하여 개국한 것보다 211년 앞선 일로 그가 왕이 되었으면 조선의 역사가 미래지향적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있다. 왕통도 소현세자의 맏아들 원손 석철을 폐위하고 차남인 봉림대군으로 세자를 삼는다. 그가 효종이다. 첫 벼슬이 봉림대군의 스승이었던 우암은 이때부터 화려하게 열린다. 한편 인조의 저주가 컸던 것일까? 소현 세자의 부인 강 씨를 역적으로 몰아 죽였고 아들 셋은 제주도로 귀양 보내 막내만 남고 나머지는 풍토병으로 죽는다.

우암은 공자의 논어보다 주자의 논어해석을 신봉하는 원리주의자이다.

위기의 조선을 구하는 데는 반개혁적이며 수구적이었다. 대원군시절 척화파를 생각해 보아라. 우암이 자기학문에서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주자대전(朱子大典)이다. 정통 주자학을 통하여 정직한 기상, 강직한 성품, 불굴의 의지를 닦을 수 있으나 지나치면 독선과 흑백논리, 학문적 편벽성에 빠진다. 우암은 주자의 해석에 단 한자도 고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암으로부터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남인 윤휴(尹休)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 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고 일갈했다. 또한 주자학은 충효를 제일로 하는 수직적 계급적 학문으로 권위주의, 가부장적 제도를 강화하는 특징이 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고 시대적 흐름인 양반체제의 완화나 해체를 위하여 주자학이외 다른 학문을 수용하여 문제를 해결했어야 함에도 뛰어난 정통유학자이며 주자 근본주의자인 우암의 존재가 큰 산맥처럼 가로막고 있으니 조선의 앞날로 보면 안타까운 일이다. 오히려 당시 지배체제만 더욱 공고히 했다. 정치의 힘과 결합된 철학은 그 시대의 문화적 속성을 결정한다.

우암의 북벌론은 허구일까?

이덕일은 그렇게 말한다. 그 이유는 그의 소중화(小中華)사상이다. ‘중국이란 지역적 개념이 아니라 도(道)가 행하여지는 지역이다. 중화인 명이 청에 의하여 멸망함으로써 중국에서는 이제 중화문명이 끊어졌고 예의의 나라인 조선만이 유일한 지역이다’라는 것이 소중화 논리이다. 따라서 스스로 중화가 된 조선은 망해버린 중화를 위하여 피를 흘릴 필요는 없다. 청나라와 국교를 단절시킬 수 있는 정도의 군사력만 보유하면 된다. 실제로 북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 이념적 북벌론 이라 볼 수 있다. 우암은 왕에게 올린 비밀 상소를 통하여 “정치를 바로하여 오랑캐를 물리친다.” 는 주자의 말을 빌려 “북벌은 정치를 닦는 것”이라 하였다. 효종의 군사적 북벌론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여기서 당시의 상황을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1737~1805)의 말을 통하여 알아보자. 그는 『허생전』에서 무능한 북벌론자들을 통렬히 비판한다. 남한설치(南漢雪恥)라는 국민감정을 부채질하여 북벌이란 허울 좋은 구호를 내걸고 백성 모두의 관심을 집중시켜 백성의 불만을 잠재우고 정작 조정의 병폐를 눈감아 버리는 당시 위정자의 무능과 허위를 고발한다. 그는 적어도 북벌을 위해서라면 삼고초려 하는 인재등용, 외척이나 훈척들의 추방, 명나라 후예와의 결탁, 청나라에 유학생파견, 중국 강남과 무역거래 등 개혁시책을 펴야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박지원의 『북학론』이다. 이 정도는 적어도 정책으로 삼아야 청나라를 이기는 부국강병책이 되는 것은 아닌지.....?. 구호만 요란한 격이다.

효종은 만 40의 나이로 갑자기 죽는다. 오직 북벌만을 생각하며 몸의 기력조차도 빼앗길까봐 여자관계도 삼가했던 왕이었다. 그의 죽음은 나라를 극도의 문치주의로 치닫게 하고 엉뚱하게 15년간에 걸쳐 백성의 삶과는 하등 관련 없는 예송논쟁에 빠지게 한다. 지금 생각하면 밥 먹고 할 일이 없어서 싸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철학적이면서 그들의 정치적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우암과 같은 주자 정통주의자의 입장은 ‘왕가도 제일의 사대부로 왕가나 사대부나 예절은 같다고 보고 장자가 아니면 차자의 예에 따라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주자비판론자나 탈유교주의자인 남인들은 국왕만은 예외라고 보는 것이다. 1차 예송논쟁은 효종의 장례에 인조의 계비인 어머니 자의대비가 얼마동안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2차 예송전쟁은 그 일이 있고 난후 15년이 흘러 며느리인 효종 비 인선왕후가 죽은 후 그 때까지 살아있던 역시 시어머니 자의대비의 상복문제이다.

1차 예송 결과는 우유곡절 끝에 타협의 산물로 경국대전의 예에 따라 기년설인 1년으로 정했다. 이때 우암의 주장논거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이다. 왕으로서 효종의 적통(嫡統)은 인정하되 가통(家統)은 소현세자에게 돌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칫 역적으로 몰릴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이론이다. 효종의 아들 현종은 가통인 소현세자의 삼남, 즉 석견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예조에서 기년복(1년)이 아닌 대공복 (9개월)을 채택한 것은 잘못 적용된 것으로 판정한다. 체이부정으로 효종을 차자로 보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후 우암을 대표로 하는 서인세력이 대대적으로 축출되고 남인정권이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따라서 2차 예송 결과는 남인의 주장에 따라 1년 복을 입게 한다. 두 차례에 걸친 예송논쟁은 이와 같이 단순히 예법의 차이에 따른 형식적인 논쟁이 아니라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국가에서 국왕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다룬 민감한 정치사안 이었으며, 거대한 권력 투쟁이었다.

현종의 아들 숙종은 강력한 왕권을 행사한 카리스마가 넘치는 군왕이다. 사극드라마에서 보면 장희빈의 치마폭에 둘러싸여 궁중음모에 휘말리는 줏대없는 왕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역사가들은 그렇게 평하지 않는다. 청풍김씨 명성왕후가 낳아 적장자 계승이라는 정통성을 바탕으로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인 우암을 한순간에 제거한 담대한 정치력을 보면 그것은 맞는 말이다. 14세의 나이어린 왕 숙종은 당시 정계 원로로 대접받으면서 할아버지 효종이나, 아버지 현종도 어려워했던 노정치가 송시열의 잘못을 바로 짚어내는 대담을 보였다. 그가 한 말이다. 당의통략(黨議通略)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나이가 어려 글을 잘 보지 못하고 예도 알지 못하지만 반드시 시열이 예를 그르쳤다고 쓴 뒤에라야 선왕이 처분하신 뜻이 명백해 질 것이니 ‘소인례(所引禮)’의 소(所)자를 오(誤)자로 고치게 하라”

숙종이 혼인한지 15년 만에 남인과 가까운 장희빈이 첫아들을 낳는다. 숙종은 그 귀한 첫아들을 원자로 삼고 이름정할 것을 결정하자 정국의 실세인 서인들과 우암은 반대한다. 중전인 역시 서인실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23세로 아직 젊기 때문에 이렇게 서두르는 것은 신중치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숙종은 이 반대를 빌미로 서인을 내쫓고 남인을 재등용 하였으며 인현왕후를 폐비시키면서 같은 맥락에서 우암을 제거한다. 그는 사약을 마시기전 문인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앞둔 스승의 마지막 유언은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主)로 할 것이며, 사업은 마땅히 효종이 하고자 했던 뜻을 위주로 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주자의 뜻을 받들어 효종의 북벌대의를 수행하라는 말이다. 우암은 남인들이 자신을 효종의 죄인으로 내몬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끝으로 우암은 격렬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적으로는 가혹한 비판이 있을 지라도 그의 문인들에게 사표(師表) 그대로였다. 개인적인 삶을 볼 때 그는 자신에게 가장 엄격한 학자였다. 더군다나 파당으로 뭉친 제자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추종의 대상이었다.

“소학(小學)은 바로 그의 평생에 걸친 수신 교과서였다. 어릴 때부터 주색(酒色)을 멀리하였으며, 또한, 그는 검소함을 으뜸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조복(朝服)도 비단이 아닌 무명을 사용 할 정도였다. 망건(網巾)에 금관자도 달지 않았다.

그의 가정생활도 소학의 실천이었다. 효도는 그에게 성인의 도(道) 그 자체였다. 효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부모께서 내게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주셨으니 이 속에는 모든 선이 다 갖추어졌다. 하나의 선이라도 밝히지 않으면 역시 불효다’

그는 부모가 생전에 가난하여 요도 없이 지낸 일이 있다 하여 평생 요를 깔지 않았다고 전해질 정도로 효자였다. 부모가 돌아가자 중형을 아버지 섬기듯이 하면서 두 아우에게는 우애와 엄정함으로 가르쳤다. 그는 확고한 가부장제 지지자이지만 부인에 대한 예우는 깍듯했다. 집에서는 부인을 손님같이 대하였고 며칠이상 바깥출입을 하러 나갈 때는 부부가 서로 절하고 귀가할 때도 절하였다.” (P383)

우암 선생은 탁월한 대학자다. 중국의 공자 맹자처럼 송자(宋子)로 불린다. 감히 누구도 그의 학문적 성과를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개혁의 시대, 변환의 시대에 살았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주자학의 프레임에 갇혀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조선을 미래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크게 기여는 못하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사람과 하늘이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은 우리의 운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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