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청동기인들은 ‘대전’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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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청동기인들은 ‘대전’을 선택했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06 09: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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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여러 가족이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들은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울타리를 두르기도 했다. 집은 땅을 약간 파고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은 움집이지만, 겉모습은 지상 가옥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또 마을 안에서 가축을 길렀으며 도구를 만드는 작업장에서는 청동기도 만들었다.

가장 이른 시기 유적으로 밝혀진 원신흥동유적

도솔터널이 통과하는 원신흥동 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유적은 대전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에 해당되는 것으로, 집터와 구덩이가 남아 있다. 이 집자리는 땅을 얕게 파고 만든 정사각형 모양의 움집인데, 돌을 돌린 화덕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 4곳에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주변에 기둥을 세운 형태로 지어졌다.

‘둔산식 집자리’라는 명칭이 생겨난 둔산동유적

시간이 흐르면서 청동기시대의 집자리는 점차 직사각형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형태의 집자리는 둔산동유적을 비롯하여 용산동, 궁동, 신대동, 노은동, 관평동, 가오동 등 대전의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으며, 이를 통해 청동기인들의 생활터전이 앞 시기에 비해 확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둔산동에서 조사된 일부 집자리는 화덕의 흔적은 없지만 긴 변의 양쪽에 각각 3개씩의 주춧돌을 놓아 직사각형의 움집을 지은 형태였다. 돌을 돌려 화덕을 만들고 주춧돌을 두어 집자리를 만든 형식은 차령산맥 이남에서만 발견되는 것으로, 중부지방에서는 둔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둔산식 집자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대동 원골에서는 길이가 16m나 되는 기다란 평면에 돌을 둥글게 돌려 만든 화덕과 맨땅을 이용한 화덕이 확인됐다.

관저동에서는 함정으로 생각되는 구덩이가 확인됐다. 이 구덩이는 타원형의 입구에 깊이가 80cm 정도이며, 바닥에는 나무창이 꽂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있다. 이를 통해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함정을 이용하여 짐승을 사냥했음을 알 수 있다.

비파형동검이 출토된 비래동유적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무덤은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되는데, 먼저 네 개의 고임돌 위에 한 개의 덮개돌을 올린 형태로 매장 구조가 지상에 드러나 있는 탁자식 고 인돌과 고임돌이 낮게 있거나 없고 매장 구조가 땅 속에 묻혀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로 구분한다.

비래동 고인돌은 바둑판식 고인돌로, 덮개돌 아래에서 비파형 동검을 비롯한 석기, 붉은간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한반도 고인돌에서 비파형동검이 나온 예로는 가장 북쪽에 속하며, 그 시기는 기원전 9세기 정도로 추정된다. 중국 요서지방에서 이런 청동검들이 발견되는데, 그것들은 기원전 10세기경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고려하면 요서·요동 지방과 이 지역이 매우 빈번하게 교류했던 것을 알 수 있어 양 지역의 관계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밖에 신대동·교촌동·대정동·관저동·세동·사성동·송촌동·가오동 등 여러 지역에서 고인돌을 볼 수 있는데 만들어진 시기가 각각 다른 것을 보면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대전지역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이 고인돌을 무덤 양식으로 즐겨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송국리형 집자리’가 조사된 상대동유적

구성동·대정동·자운대·상대동 일대에서는 늦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조사됐다. 조사된 집자리의 수는 많지 않지만 집의 크기나 출토된 도구의 모양을 통해 볼 때 이 시기에 이르러 농경 이 확산되고 가족의 형태도 개별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상대동 중동골에서 드러난 집자리로, 원형 집자리 가운데에 기다란 타원형 구덩이를 파고 그 양 끝에 기둥 구멍을 판 모양이다. 이런 형태의 집자리는 충남 부여의 송국리에서 처음 조사되어 ‘송국리형 집자리’라고 부른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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