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광복 이후 대한민국 중심도시로 ‘눈부신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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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광복 이후 대한민국 중심도시로 ‘눈부신 성장’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2.27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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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옛 충남도청사
옛 충남도청사

1945년 8월 15일,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펼쳐졌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리로 우리 민족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국토의 분단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여러 나라는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갈라졌고, 그 대립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나라가 두 개로 나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은 자유민주국가 체제의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광복 후 대전지역의 행정구역은 일제 때의 제도를 이어오다가 1949년 대전시로 개칭됐다. 1950년에는 6·25전쟁으로 정부가 대전으로 옮겨오면서 6월 28일부터 7월 14일까지 임시수도 역할을 했다.

남쪽으로 내려오는 북한군을 저지하는 금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한·미 양군은 전국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대전을 굳게 지키려고 하였다. 대전의 방어를 맡은 미24사단은 북한의 4개 사단에 포위되어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지휘관인 딘 소장이 인민군 포로가 되고 전투에 밀리면서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현 대전시청 전경
현 대전시청 전경

한국전쟁이 끝난 후에는 복구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전에는 북쪽의 피난민이 다수 거주하였고, 또한 전국에서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 대전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처럼 폭발적인 인구의 증가 현상이 나타나면서 대전은 중부지방의 행정, 문화, 경제의 중심도시로 발전했다.

6·25전쟁 후 이승만 정권은 장기집권을 위해 무리한 헌법 개정과 독재 정치를 강화했다. 1960년 3월의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은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정권을 연장하려 했다.

이에 학생과 시민들이 자유당 독재에 항거하였으며, 대전에서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부정선거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대구 2·28의거와 함께 전국 학생 시위의 도화선이 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4·19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대전 원도심 전경

이후 대전은 오랜 기간 충청남도의 도청 소재지로,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에는 중부지역의 중핵 도시로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어갔다. 특히 1974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대덕연구단지로 인해 대전은 과학도시로의 터전을 마련했으며, 1993년에는 대전 엑스포를 개최하면서 위상을 한층 높였다.

또한 둔산지구에 정부청사가 세워져 행정의 중심도시가 되었고, 인근 세종시에 정부청사가 이전하면서 국가 행정의 배후도시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정부대전청사가 위치한 둔산지구 전경
정부대전청사가 위치한 둔산지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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