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대전이 ‘산성(山城)의 도시’가 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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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히스토리] 대전이 ‘산성(山城)의 도시’가 된 이유는?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1.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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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계족산성
계족산성

기원전 1세기경에는 한반도 북부에 고구려, 남부에는 백제·신라·가야가 세워졌다. 특히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치열하게 싸웠으며 필요에 따라 서로 동맹을 맺기도 했다. 가야는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나 6세기에 신라에 병합됐다.

삼국은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였는데, 결국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문화를 받아들여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고, 통일신라의 북쪽에서는 고구려의 북쪽 영토를 중심으로 발해가 건국되어 발전하면서 남북국의 형상을 이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는 기원전 18년경에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건국됐다고 한다. 백제의 전성기는 근초고왕(346~375) 시기로,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여 전라도와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북쪽으로 진출하여 고구려의 평양성까지 공격하였고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전사했다.

이렇게 하여 백제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낙동강 중류 지역, 강원도, 황해도 일부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발전하였다. 대전지역이 완전히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도 이때로 볼 수 있다.

보문산성
보문산성

대전은 전국에서 산성이 가장 많은 도시이다. 대전에 있는 산성을 모두 합하면 48개나 된다.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긴 5세기 말에서 6세기까지 가장 많은 산성을 쌓았다.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두 나라의 국경 지역에 위치한 대전 지역에 공격과 방어를 위한 산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보문산성과 계족산성으로, 대전 중구 대사동 보문산(해발 406m)에 위치 한 보문산성은 둘레가 약 300m로 정상 부분의 산세를 이용해 쌓았다. 백제 말에 신라와의 전투가 치열했을 때에 주변의 산성과 쉽게 연락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 대전 대덕구 장동 계족산(해발 423.89m)에 위치한 계족산성은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쌓았다. 산성 높이는 약 7~10m 가량 되며 동·서·남쪽에 서는 문터가, 성 안에서는 삼시대에 만든 집수터가 발견됐다.

한편, 신라는 당의 도움을 받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나라와 전쟁을 벌여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백제는 660년 멸망한 후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흥운동을 벌였다. 백제는 웅진으로 가는 길을 막아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를 고립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백제 부흥군의 내분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통일 후 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백제시대의 우술군을 비풍군으로, 노사지 현을 유성현으로, 소비포현을 적오현으로, 진현현을 진령현으로 이름을 바꿨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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