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히스토리] 경부선 개통과 일본 거류민의 등장
상태바
[대전 히스토리] 경부선 개통과 일본 거류민의 등장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2.10 11: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전의 옛 이름은 한밭으로 ‘큰 밭’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대전이라는 이름은 동국여지승람(1487)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지만, 지금의 대전 영역은 조선시대 회덕현, 진잠현, 그리고 공주목 유성지역이 합쳐져서 된 것입니다. 선사 이래 많은 유적과 유물이 쏟아질 만큼 풍요로운 땅이자 저명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선비의 고장으로, 현재는 대한민국 과학기술의 요람이자 19개 대학 14만 명의 젊은 인재들이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대전 히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대전의 역사와 인물들을 되돌아보고 150만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갖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합니다.

 

일제강점기 대전역앞 중앙로
일제강점기 대전역앞 중앙로

20세기 초에 들어서면서 한밭으로 불리던 조용한 대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경부선 철도가 대전의 한복판을 지나가게 된 것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물자를 빠르고 손쉽게 일본으로 가져가고 중국대륙을 침략하기 위한 물자를 옮기기 편리하도록 철도 건설 계획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대륙을 침략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 빠르게 대비할 수 있도록 서울과 부산을 오갈 수 있는 철도(경부선)와 서울과 북쪽의 신의주를 잇는 철도(경의선)를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1904년 6월에 대전역이 세워지고, 11월에 경부선 철도가 준공되었으며, 1905년에 완전 개통됐다. 철도가 지나게 되면서 조용하고 한적하던 대전은 우리나라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정치, 행정, 재정, 경제, 교육 등에 간섭하였다. 또한 일본의 필요에 따라 법을 제정하고 이를 정치에 반영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일본인들의 조선 이주를 장려했다. 그 결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사람이 증가하고 일본인 관리의 수도 증가했다.

일본 대전수비대
일본 대전수비대

일본 이민단이 많이 정착한 곳은 서울을 비롯한 중요 도시였다. 철도공사가 진행되고 철도가 개통되면서 대전 지역에도 철도와 관련된 많은 일본인들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대전에 자리를 잡고 살면서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식 건물이 들어서고 상점과 은행 등도 생겨났다.

1906년 4월에는 일본인 대전심상소학교(초등학교)가 대전의 원동에 세워졌다. 그 후 현암리(지금 삼성동 삼성초등학교 부근)에 병원이 세워지면서 일본인의 활동 범위는 점차 인근의 한국인이 사는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점점 늘어나는 일본인들에 의해 대전에는 일본풍의 거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907년 여름에는 일본인들의 공동묘지가 선화동에 생겨났으며 소제동의 주산에 신사(神社)가 처음 세워졌다. 신사가 들어선 소제호 주변은 우암 송시열의 옛집(송자고택)이 있던 곳으로, 크고 작은 한옥들이 모여 있던 조선의 전통마을이었다. 신사와 그 주변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여가 및 휴식을 위한 공원으로 조성됐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인들에 의한 근대화가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1904년부터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경제적인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 특히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한국인들을 경제적으로 몰락시켰다. 당시의 우리나라는 근대적인 경제체제를 확립하지 못했으므로 일본인의 경제적 침략에 적절히 저항하지 못했다. 화폐정리사업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를 무력화시킨 일본은 곧이어 회사, 공장, 은행 등 경제를 담당하는 기관을 점령하고 경제적 침략과 수탈을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로 진출하는 일본인들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1909년경 대전에는 일본인 인구가 24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이 주로 거주하던 대전역 부근인 지금의 원동, 중동, 정동 지역은 일본식 시가를 이루고 그들의 상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대전천(목척교)을 건너 지금의 은행동과 선화동으로 번져갔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본은 11월 일본인들이 대전을 통치하기 쉽도록 회덕군청을 읍내동에서 지금의 원동으로 옮겼으며, 1914년 3월에는 회덕군, 진잠군, 공주군 일부를 합쳐 새로운 행정구역인 대전군을 만든 후 군청을 대전 원동에 두었다. 그리고 면장과 군수를 모두 일본인으로 임명하여 모든 행정 업무를 일본인이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밖에도 과례리와 대사리 일원의 넓은 땅에 일본군을 주둔시킨 후 각종 군부대를 만들었다. 이때 만들어진 군사기지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삼아 중국대륙을 침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대전 목척교 부근 풍경
일제강점기 대전 목척교 부근 풍경

1914년 1월 11일, 호남선이 완공되면서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합쳐지는 한반도 철도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대전은 중국 만주의 석탄, 압록강의 목재 등의 원료가 공급되고, 일본에서 생산된 공업 제품이 소비되는 중간지점이었다.

이에 대전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는 크게 늘어났다. 1912년 무렵에는 대전에 사는 일본인 거주지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해 대전의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주요 다리인 목척교가 완성되었으며, 대전역에서 충남도청이 있던 공주로 통하는 도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이후 대전-금산 간 도로가 새로 놓여 대전의 교통이 한층 더 발전하였다.

당시 대전은 대전역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일본인 상가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금의 효동, 인동, 원동 일대가 혼마치(本町)라고 불렸는데, 이곳에 일본인이 가장 많이 살았다.

한편 한국인들은 지금의 인동에 위치한 대전시장(한밭장)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보부상(봇짐·등짐장수)으로, 빈약한 경제력을 유지하다가 점차 점포상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침략을 당하면서 일본인의 회사, 공장, 점포 등에 고용되었던 한국인들이 대전 중심 지역을 벗어나 주변의 빈약한 가옥에 거주하게 되었다. <도움 : 대전시 문화유산과>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대전의 고택
힘내라! 중소기업
인물로 본 충남역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