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시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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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시대 교훈
  • 임영호 칼럼
  • 승인 2017.01.06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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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인문학 노트] 책 속에서 길을 찾다
▲임영호 코레일 상임감사

언론인이면서 전직 공보처 장관이었던 오인환(吳隣煥)의 『고종시대의 리더십』을 읽었다. 역사시간에 나는 고종시대 전후의 짧은 기간에 복잡하고 중요한 사건이 많아 공부하기가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고종 시대는 우리역사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다.

한반도가 역사적으로 930여회의 크고 작은 외침이 있었지만 이 때만큼 한꺼번에 밀려드는 외세에 정신없이 쓸려 나간 적이 없다. 시간이 흘러 100여년의 세월이 흘러갔어도 그때의 강대국인 중국·러시아·일본·미국은 여전히 세계 속의 강대국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게다가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는 북한까지 있으니 주변 상황은 나아졌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고종시대의 위기관리 경험과 시행착오로 얻은 교훈은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크다.

조선은 왜 망했나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나.

이완용 때문인가, 고종 임금, 아니면 민비 때문인가, 고리타분하고 꽉 막힌 유학 때문인가, 허구한 날 싸운 사색당파의 당쟁 때문인가, 아니면 당시 부패한 관리들 때문인가, 대원군의 쇄국 정책 때문인가? 이런 단편적인 것으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일제가 구성한 식민사관의 왜곡도 있다.

사실 조선이 어느 정도의 체제를 유지했다고 해도 당시 제국주의 물결 속에 침략해 오는 열강의 무력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가정이지만 부정적이다. 일본에 패배한 청국이나 러시아보다 더 강한 군사력을 가졌어야 되는 일이다. 국가는 자위 능력을 갖춤으로써 존속한다. 타국의 힘에 의존하여 자기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 고종시대가 한중일 동양 삼국 중 근대화 추진과정에서 지각생이 되었는가?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인가. 조선의 경우 양이사상(洋夷思想)이 동양 삼국 중 가장 격렬하고 본격적이었다. 위정척사(爲政斥邪)사상이란 구국의 논리는 대원군시대를 지배하는 사상이다. 대원군 시대에는 우암 송시열의 북벌론의 연장선인 위정척사사상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논리를 제공하는 선각자나 강력한 개화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청나라나 일본처럼 서양의 문물을 배워야 서양을 이길 수 있다는 사상가나 학자가 1860년대에 조선에는 없었다. 20년이 흘러 1880년대에 와서야 등장한다. 당시에 추사 김정희는 해국지도(海國地圖)의 주해 편을 읽고 난 후 겨우 서양배가 쳐들어오는 것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50대 이후, 시야가 넓어진 후에 개혁의 주역이 되었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대원군은 국왕과 민비에 대한 복수심과 적개심, 정권에 대한 노욕으로 끝을 맺는다.

일본의 근대화는 어떻게 시작 되었나?

▲요시다 쇼인

이 사람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으로 부터 출발한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무사출신으로 일본에 개혁사상을 전파한 사람이다. 그는 서양을 배운다는 목적으로 미국 흑선(黑船)을 타고 밀항하려다 막부에 수감되었고 출감 후 작은 개인 서당인 쇼카 손주쿠(松下村塾)를 세워, 명치유신의 문을 연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많은 일본수상과 각료가 된 제자들을 길렀다.

그는 죽어서 불후(不朽)가 되려면 때와 장소를 가려서는 안 되고 국가의 대업을 이루려면 오래 살라는 사생관(死生觀)과 일본 혼을 그들에게 심어주어 일본제국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당시 잔인한 막부의 사상탄압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1854년 그의 제자들은 외국 문물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학생 50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1년 6개월 동안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토의 개혁 세력인 사쓰마·조슈번벌(藩閥) 세력과 더불어 강력한 개혁동조세력을 만들어 명치유신을 완성한다.

이리떼처럼 몰려오는 서양의 열강에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의 경우에도함께 개혁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이홍장(李鴻章)은 여진족이 주인인 청나라 정부에 고용된 한족 대표 같은 것이어서 주변에 정적(政敵) 투성이였다. 자신을 믿고 지원해주는 서태후의 마음이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몰라 막대한 뇌물을 주는 등 보신책을 써야 만 했다. 그래서 시대에 뒤떨어진 중국사회를 대수술하는 국내의 정치경제제도 등의 개혁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서양의 근대기술만 도입하였다. 근대화를 위하여 중화사상과 서구문명 사이에 양자를 형식적인 외피로 봉합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은 결국 실패한다.

▲흥선대원군

대원군도 점증해가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여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한다. 조선조에 시행한 복고적 국방강화책이나 쇄국정책으로 열강을 몸으로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러면 1884년, 김옥균 등이 일으킨 위로부터의 개혁, 일본에 의지한 혁명인 갑신정변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을까? 위안 스카이의 개입과 일본의 소극적인 대응이 직접적인 실패원인이지만 개화파의 우군세력은 너무 없었다. 민비의 수구당, 대원군의 우군인 위정척사파가 한줌의 목숨을 겨누고 있었고 일부 역관이나 중인을 제외하고는 일반백성들이 아직 개화에 대한 조그마한 의식조차도 없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양반사회의 개화 의지가 응집되려면 수많은 토론을 통하여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 했다. 10년 뒤 갑오농민 봉기에도, 그 후 10년 뒤 독립협회의 활동기간에도 성리학적인 왕이나 사대부의 민 지배사상은 없어지지 않았다. 자주적인 개혁이 되려면 백성이 개혁의 대등한 동지라는 생각이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오랜시간이 필요했다.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가치를 몰랐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후 15년이 지나 1896년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민회를 만들어 토론회를 개최하고 토론회의 결론을 참석자의 투표로 결정하는 등 민권 사상을 계몽했고, 절반은 독립협회에서 선출하고 반은 정부에서 추천하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의회 설립까지 정부에 제안한다. 사학자 신용하(愼鏞廈, 1937. 12.14 ~) 는 이것을 영국·독일·일본의 상원보다 더 공화제적인 요소가 많은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루어 지지 않았다. 1898년 11월 5일 선거실시를 공고했으나 고종황제가 번의하였다. 당시에 1만 명 이상 모여 시국을 논하고, 국가 위기 시에 외세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 발전세력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데도 고종은 자기 권력에 도전하는 정적의 관점으로만 계산해서 국가안보에 결정적인 우군을 버린 것이다. 물론 자기들의 야욕에 방해가 될 독립협회의 가치를 알고 있는 일본의 방해공작도 있었다.

그때 고종이 백번 양보하여 민의 대표기관인 의회가 생겼다면 총 한방 사용하지 않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차지할 수 있을까? 민권이 성하면 나라가 더 자주독립하고 부강해져서 군권이 강화된다는 독립협회의 상소를 고종은 믿지 않았다. 1904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늑약을 강요할 때 고종이 백성들에게 상의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하자 이토는 “조선은 전제 군주국이다. 언제 국민들에게 정책을 물은 적이 있는가. 폐하가 결정하면 끝이다.” 라고 면박을 주었다. 차갑고 뼈아픈 지적이다.

고종의 영세 중립국론은 당시 현실에서 가능한 일인가?

▲고종 황제

1903년 8월, 고종은 러일 전쟁의 전운이 짙어 지자 영국·프랑스·러시아·일본·네덜란드 등에 사절을 보내 한국의 중립화 안을 보증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열강의 반응은 냉담 했고 그 중립화 안을 무시했다. 대륙세력인 프랑스·독일·러시아와 해양세력인 일본·영국·미국이 한반도에서 대결구도를 갖게 되면서 약소국인 당사자의 목소리는 끼어 들 여지가 없었다. 힘없는 나라에 누가 눈길을 주겠는가. 각 세력들은 오히려 한반도 분할론 등을 내세우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입장을 위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고종은 1876년, 대외 개방을 한 이래 한반도 주변 열강을 상대로 이이제이(以夷制以)전략을 써왔다. 국력과 군사력이 약한 조선이 열강이 서로 견제하는 구도 속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하여 버티는 생존전략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청이 열강을 상대로 한 이이제이 정책에서 실패했듯이 약소국이 강대국을 상대로 하는 이이제이 외교는 성공하기가 어렵다.

고종시대의 외교를 종합해보면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 속에서 조선의 안전을 도맡아 왔고 중심 추 역할을 하던 중국이 배제되면서 혼란이 왔고, 대안이 될 수 있는 열강으로는 미국이 가장 유력했으나 미국도 일본과의 동맹으로 국익 챙기기에 연연하다 보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자국 이기주의가 고종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결국 외교는 자국의 실익이 중심이며 우리나라가 강할 때만 원하는 안을 이룰 수 있다.

이 책을 덮으면서 백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의 정치지형은 변함이 없다는 느낌이다. 2008년, 서울에 왔던 89세의 헨리 키신져(Henry Kissinger)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 큰 갈등이 생기면 한국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키신저는 초강대국인 미국과 거기에 맞서고자 하는 신흥 강대국인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균형 잡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고, 자칫 어느 한 쪽에 빌미를 주게 되면 곤란한 처지에 빠질 수 있음을 암시한 것이다.

지금 한국은 안보는 한미방위조약으로 미국과 동맹관계이고, 경제는 중국과 제1의 무역 상대국일 만큼 긴밀한 관계이다. 더구나 북한과의 관계에서 중국의 비중은 매우 크다. 한국이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 일지라도 주변 열강에게 빌미의 덫을 경계하는 처지라는 점에서 고종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따라서 고종시대의 전반적인 상황을 반추하여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답은 하나다. 강소국(强小國), 작지만 강한 나라가 되는 길이다. 좀 더 강한 경제 군사력과 국민의 일치된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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