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4. 통일신라를 뒤흔든 웅천주 도독 김헌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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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4. 통일신라를 뒤흔든 웅천주 도독 김헌창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0.14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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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통일신라 9주 5소경

676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백제의 도읍이 있던 충남은 통일신라의 변두리가 되었다. 신라는 삼국통일 후 크게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9주 5소경’을 실시했다. 9주 5소경은 도읍인 금성(경주)을 뺀 지방을 9개 주로 나누고, 주요 지방에 5개 소경을 설치하는 제도다.

옛 백제지역에는 웅천주(웅주)·전주·무주 등 3개 주를 두고, 서원경(충북 청주)·남원경(전북 남원) 등 2개 소경을 설치했다. 지금의 충남지역은 모두 웅천주에 속했다.

또 웅천주에는 13개 군과 29개 현을 설치했는데, 백제의 도읍이던 사비는 부여군으로 이름이 바뀌어 웅천주에 속했다. 신라가 백제의 도읍이던 사비와 웅진에 소경을 두지 않은 것은 이곳을 중심으로 다시 백제부흥운동이 시작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중국과 가까운 충남은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해 선진 불교를 받아들였다. 당시 충남 보령에는 성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던 무염 스님이 돌아와 선종을 널리 전파하는 중심이 됐다. 무염 스님이 널리 퍼뜨린 선종은 부처를 믿고 따르는 대신 각자 불성을 키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선종의 이런 가르침은 백제와 고구려 출신 귀족과 유민이 신라의 감시와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과도 잘 맞았다. 실제로 백제와 고구려가 있던 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저항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공주 공산성
공주 공산성

특히 822년 웅천주에서 일어난 김헌창의 난은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금성을 위협할 정도로 매우 큰 사건이었다. 김헌창은 통일신라 왕족이자 웅천주 도독이었는데, 그는 아버지 김주원이 귀족들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김헌창의 난은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았다. 통일신라의 9주 5소경 가운데 백제 땅이던 무진주, 완산주를 포함해 무려 4개 주와 3개 소경이 반란에 참여했다. 당시 통일신라는 7년 동안 이어진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리는데도 왕실과 정부는 권력 다툼에 빠져서 정치는 어지럽고 백성은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헌창의 난은 헌덕왕이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고 열흘 만에 실패로 끝났다. 김헌창은 웅진 도읍기에 임금이 살던 웅진성(공주 공산성)에서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진압군에게 성이 함락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김헌창의 난을 시작으로 이처럼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 일어나서 더는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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