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충남역사] 9. 망이·망소이 형제, 신분해방을 부르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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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본 충남역사] 9. 망이·망소이 형제, 신분해방을 부르짖다
  • 이호영 기자
  • 승인 2019.10.24 14: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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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은 산·강·평야가 조화롭게 발달하고, 서해의 풍부한 물산과 편리한 교통으로 예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불렸습니다. 또한 한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이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충남의 인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온몸으로 일어서는 충절의 정신을 보여줬습니다. 이에 밥상뉴스는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과 함께 역사 속 인물들을 중심으로 충남이 지닌 유구한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를 통해 자라나는 청소년과 주민들에게 자긍심과 지역사랑을 심어줄 수 있는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1176년 공주지방에서 망이·망소이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난은 주도자의 이름을 따서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불리며, 형제가 살던 곳이 공주 명학소여서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공주 명학소는 유성현 동쪽 10리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고 했는데, 학계에서는 지금의 대전 탄방동 일대가 해당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망이·망소이 형제가 일으킨 반란은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으며 지금의 충청도 일대를 모두 차지 할 정도로 세력을 떨쳤다. 고려시대에는 나라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받고, 세금을 걷기 위해 지방에 향·소·부곡이라는 특수한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이곳에 사는 주민은 자기, 철, 숯, 종이, 소금 등을 만들었는데, 명학소에서는 숯을 구워 낸 것으로 짐작된다.

대전시 서구 탄방동 남선공원에 설치된 명학소 민중봉기 기념탑

이들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야 했고, 신분차별을 받았다. 망이·망소이 형제는 자신들이 살던 특수행정구역인 ‘소’를 일반행정구역인 ‘현’으로 올려 달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놀란 고려 조정은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하고, 쌀과 곡식을 주며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그 때 고려는 조위총 장군이 일으킨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이·망소이 형제는 조정을 믿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약속을 지키지 않자 형제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공주, 예산, 아산, 천안을 포함한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다. 그 사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한 고려 조정은 대규모 진압군을 보냈고, 망이·망소이 형제가 잡히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났다.

비록 망이·망소이의 난은 성공하지 못했지만, 향·소·부곡 주민이 낮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처음 벌인 운동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봉선홍경사 갈기비

한편, 고려시대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목이나 발길이 뜸한 곳에 지은 절이 꽤 많다. 천안 봉선홍경사도 나라에서 세웠다. 봉선홍경사 갈기비(국보 7호)에는 누가, 언제, 왜 절을 세웠는지 나온다.

천안시 서북구 성환읍 대홍리에 있는 이 비를 보면, 봉선홍경사 부근은 사람들이 지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사람들이 자주 지나는 곳이지만 갈대가 우거진 늪이 있어 강도가 많았고, 여행자를 위한 숙소가 없어서 불편을 겪었다. 그래서 절과 원을 지었다고 한다.

원은 고려시대에 잠잘 수 있는 시설이다. 고려시대에는 중요한 길목이나 사람이 드문 곳에 절과 원을 지어 승려에게 운영을 맡겼다. 절을 ‘사원’이라 부르는 것도 옛날에 절과 원이 함께 운영된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현종의 명령으로 1021년에 완공된 봉선홍경사는 1176년 망이·망소이의 난 때 완전히 불에 탔다. 이 후 절은 다시 세워지지 못했지만 조선시대에도 한양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라 여관인 홍경원은 계속 운영되었다. <도움 :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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